[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아니 보고, 안 쓰려 해도 감동이 되어 >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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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 민들래 의원의 모든 원장 선생님과 간호원 선생님께’로 시작하여 ‘이런 정신을 영원히 빛나기를 바라면서... 안녕.’으로 마무리되는 편지. 이 편지의 발신자는 73세의 임청복 할아버지다. 법동 주공3단지에 거주하며 민들레 의원에 하루가 멀다 하고 내원하시는 분이다.

“민들레 의원을 언제부터 이용하셨어요?”
“교통사고가 났을 즈음이니까, 작년 12월부터 일거에요.”


지난 해 유월에 탄방동에서 법동으로 이사 온 임청복 님은 폐암 수술 후유증으로 생긴 상처 때문에 왼쪽 겨드랑이에 매일 드레싱을 받아야 한다. 민들레 의원을 찾은 것은 이 같은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박지영 원장님, 나준식 원장님, 지금은 출산휴가를 가신 송지혜 원장님... 이적지까지 다닌 병원 중에 최고로 잘해 주시고, 우리 가정같이 말입니더. 간호원 선생님들도 그렇고요. 내가 미안할 정도로...”

혼자 살고 계시는 임청복 님은 법동에 오자마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날이 더 많았다. 걷는 것이 어려워 밖을 돌아다닐 수도, 이웃을 사귈 수도 없었는데, 그런 중 만난 민들레 의료진이 마치 형제 같았다고 했다. 거동이 불편한 임청복 님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 민들레 재가의료팀이 집을 방문하여 가정간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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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한 말씨에 경상도 억양이 얹어있지만 임청복 님의 고향은 중국이다. 태어나 자란 곳이 중국 길림성 장춘이고, 어머니가 경남 밀양 사람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한족의 말과 글을 쓰며 살았지만, 그는 어머니 고향 말씨인 경상도 사투리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의 부모는 일제 강점기 때 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 1970년대 중국 문화혁명기 때 집안이 큰 고난을 겪었다. 조선인으로는 고위직에 올랐던 외삼촌이 홍위병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마흔 둘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갓 스물이었던 그는 학교도 다 마치지 못하고 어린 동생들을 키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고.

“교육 공작(학교 교사)일이 주어져서 그것도 하고, 장부 회계를 잘한다고 해서 그것도 하고, 병원에서 시험을 쳐서 자격증 따고 의사 노릇도 했어요.”(당시 중국에서는 의대를 나오지 않아도 일정한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로서 진료를 할 수 있었다.)

식솔을 이끌고 한국으로 온 것은 1990년도였다.

“한국 땅이라도 밟아보고 죽자고, 그때 친한 친구들도 많이 나왔어요.”

한국에서의 생활이 녹록치 않았지만, 밀양의 친척들도 찾았고 몇 년 전에는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하루 일과는 단조롭고 갑갑하다고 했다. 다리가 불편해지기 전에는 나가서 운동도 했는데, 지금은 아침에 민들레에 다녀오고, 티브이로 뉴스를 보고 신문을 읽고, 저녁에는 드라마를 보고 잠든다고 했다. 정치와 시사에 관심이 많은 임청복 님은 “선생은 나와 다른 생각일지는 몰라도, 어떤 정치인을 보면 너무 한심해서 웃어요.”라고 말했다.

“농민들은 뙤약볕 고추밭에서 땀을 쫄쫄 흘리며 일하는데, 국회의원들은 그늘진 방에서 말싸움이나 하면서 소일합니다.”

사회주의 체제의 중국에서 혹시나 협동조합 경험이 있었을까? 중국에서는 민들레 같은 형태의 협동조합은 없고, 협동 농장이 있어 온 가족이 살았다고 했다.

“우리 딸, 사위에게 자랑을 해요. 민들레 병원을요. 잘해주시는 게 너무 미안스러워 밥 한 끼 청해도 안 잡숫는다 하고...”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거주하고 있는 임청복 할아버지는 민들레가 ‘우리 가정’ 같다며 “진짜 고마워요”라고 여러 번 고마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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