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교통, 튀김소보로, 칼국수, 황톳길......
인터넷에서 ‘대전’을 검색하면 나오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대전이 ‘산성의 도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전 대덕구 계족산은 황톳길 맨발 걷기로 유명하다. 이 황톳길을 맨발로 걷다 보면 대한민국 사적 355호이자 대전시기념물 제2호인 계족산성을 만날 수 있다.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한 계족산성은 산 정상에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석축 산성이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성벽과 군데군데 흘러내린 성돌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계족산성에 오르면 대전 시내는 물론 대청호 너머로 충북 보은과 옥천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왜 이곳에 산성을 쌓았는지를 짐작케 하는 광경이다. |
대전에는 확인된 산성만 48개소에 달한다.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60개가 넘을 것이란 추정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 왜, 언제, 무엇 때문에 산 정상에 성을 쌓았을까.
많은 사람이 대전을 엑스포와 과학기술의 도시로 기억하지만 대전은 오래전부터 모든 교통수단이 거쳐 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남반부의 중심에 있어 영남이나 호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핵심 지역이다. 반대로 서울을 장악한 세력이 남하하기 위해 먼저 차지해야 할 지역이기도 하다. |
이런 교통과 군사 전략 측면에서 요충지인 대전을 사수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산성들이 축조됐다. 대전의 산성을 알기 위해서는 백제 역사를 알아야 한다.
대전은 백제의 영토였지만 수도 위례성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끄는 3만 군대에 왕성을 빼앗기고 개로왕까지 목숨을 잃는 치욕을 겪으면서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긴다. 웅진은 차령산맥 남쪽에 있어 북쪽의 고구려를 방어하기 좋고 금강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나 금강 중상류에 위치해 신라에서 백제까지 뱃길로 하루면 당도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수도 인근에 있는 대전에 방어시설을 구축해 수도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은 셈이다. |
백제 23대 동성왕(479~501)은 신라에 대한 경계 차원에서 대전 동쪽 부근에 많은 성을 쌓아서 ‘동성왕(東城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해석이 있을 정도다. 대전 지역 모든 산성이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것은 아니지만, 군사적 목적에 따라 군마 이동통로를 감시하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됐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산성의 위치가 고대 교통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식장산과 계족산 줄기에 산성 20여 개소를 쌓았고, 갑천변과 금강 주변에도 성과 보루를 쌓아 전쟁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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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대전 동쪽에 수십 개의 산성을 쌓으며 신라를 견제했지만,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결국 멸망하게 된다. 이후 3년 동안 백제 곳곳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시기에도 대전의 산성은 부흥운동의 거점이 됐고, 일부는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사용됐다. 오랜 세월 대전과 함께 자리를 지킨 산성이 지금은 낡고 허물어져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역과 나라를 지켰던 의미는 그대로다.
사람은 산성을 잊었지만, 산성은 지난 1천 500년 동안 말없이 대전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최근 대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을 연결한 ‘대전 둘레산길’이 시민의 사랑을 받으며 산성에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