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동네 의사 야옹 선생, 진료실 밖으로 나서다 >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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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얻은 뒤 저는 줄곧 '진료실'이라 부르는 공간에 앉아서 환자들을 만났습니다. 진료실은 환자와 의사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자 의사의 공간이죠. 진료실 책상과 의자, 책장의 위치와 책장에 꽂힌 책들, 환자를 진찰할 때 쓰는 도구들은 모두 의사인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으니까요.

진료실에서의 일상은 매일매일 비슷합니다. 아침 9시에 진료를 시작하여 점심시간에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오후 진료가 이어집니다. 그렇게 하루에 만나는 환자가 60명에서 70명 정도, 많은 날에는 80명이 넘기도 합니다.

열이 나는 환자, 기침을 하거나 목이 아픈 환자, 배가 아프고 설사를 하는 환자, 고혈압이나 당뇨로 약물 복용을 하는 환자 등 많은 분들이 진료실로 저를 찾아옵니다. 환자가 오면 인사를 하고, 근황을 여쭙고, 어디가 불편하신지 살펴봅니다. 진찰을 하고, 약처방을 내고 잘 가시라는 인사를 하고 나면 환자 한 명의 진료가 끝납니다. 가끔 환자가 길게 하소연을 하기도 하고, 복잡한 병력을 가지고 있거나 여러 문제로 상담이 길어지기도 하지만 평균 10분 내외로 끝나지요.

진료실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저에게는 손님이자 객체입니다. 진찰을 하고 검사나 처방을 내리고 진료실 밖으로 내보내면 하나의 미션이 완료되고, 다음 미션으로 넘어갑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이런 일상이 평생 계속되리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2년 전 장애인 건강주치의 사업이 시작되고, 제가 일하는 병원이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부터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장애인 건강주치의 사업'은 장애인 건강권법에 의해 장애인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지원, 장애인 보건관리 체계 확립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여 장애인의 건강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18년 5월에 시작되어 중증 장애인을 대상으로 의사가 주치의로 역할을 하며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의료를 제공하도록되어 있는데 이 사업에 방문 진료와 방문 간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의사 혹은 간호사가 장애인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이죠.
아직은 시범사업이라 참여를 희망한 병원과 의사만 방문 진료를 할 수 있고, 전국에서 총 262 개의 의료기관이 참여 신청을 하였으나 방문 진료를 시행한 곳은 29개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머릿글이 길어진 이유는 제가 진료실을 나서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솔직히 진료실 바깥의 공간에서 환자를 만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내가 혼자 밖에 나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귀찮은 일에 휘말리면 어떡하나', '과연 밖에 나간다고 진료실에서보다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들도 앞섰습니다.

그런데,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2019년 12월부터 '왕진시범사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왕진은 장애인 주치의 사업의 방문 진료와 달리 대상자가 장애인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장애등급을 받지 못했더라도 거동이 현저히 불편한 환자들은 왕진 요청을 할 수 있습니다. 치매 어르신, 뇌경색이나 뇌출혈 등으로 마비가 있는 분들, 수술 직후의 환자, 말기암 환자, 호흡이 불편하거나 몸에 소변줄, 콧줄 같은 튜브가 삽입되어 있는 환자, 욕창 환자, 출산 후 움직이기 힘든 산모들까지도 왕진 대상에 포함됩니다. 물론 장애인도 포함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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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시범사업이라 사업에 참여 신청을 한 병원만 서비스가 가능합니다. 전국적으로 348개의 의료기관이 왕진시범사업에 참여 신청을 하였습니다.
장애인 방문 진료가 일상적인 건강 관리와 질병 예방에 집중한다면 왕진은 갑자기 몸이 불편하거나 아픈데 병원에 나올 수 없는 경우 의사가 집으로 찾아가 진찰과 치료행위를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환자가 아프면 의사가 집으로 찾아가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왕진서비스제도가 없어 안타까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시범사업이나마 왕진을 시작한다니 의사로서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2019년 12월, 저는 장애인 건강주치의 방문 진료를 위해 처음으로 가운을 입은 채 진료실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방문한 환자는 고혈압, 당뇨를 진단받은 지적장애인인데, 제대로 약을 안 드셔서 혈압과 혈당 조절이 전혀 되지 않았던 분입니다. 저에 대해서도 경계를 하셔서 약을 잘 챙겨 드시라고 하면 벌컥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시기도 했었죠. 그러면 저도 기분이 나빠져 마음 속으로 '저러면 환자만 손해지~' 이러고 말았죠. 사실 저는 그분이 지적장애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조금 순진하거나 엉뚱한 분이시구나 했을 뿐입니다. 그만큼 제가 장애인에 대해 무지했던 것입니다. 장애인 건강주치의 사업을 시작하면서 혹시나 해서 여쭤보니 장애인 카드를 보여주셔서 환자분이 지적장애가 있으신 것을 알게 되었고, 장애인 주치의 등록을 권유하여 방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집으로 한발 들어서는 순간 그분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남편을 처음 만났는데, 환자분이 손목 통증으로 집안일을 거의 못 하는 상태라고 알려주십니다. 지적장애로 스스로 약을 시간 맞춰 챙기기 힘들어 남편이 일일이 챙겨줘야 해서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두 분의 관계는 좋아 보입니다.

눈이 잘 안 보이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당뇨가 있어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안과 검진도 그동안 건성으로만 대답하셨는데, 직접 집에 가서 물어보니 재작년에 하고는 안 했다고 하십니다. 건강검진도 한 번도 안 하셨다고 합니다. 내시경 무서워서 못 하신다고 쑥스럽게 웃으십니다. 보관하고 있는 약들을 살펴보니 고혈압, 당뇨약에 몇 달 전 처방받은 변비약이며 감기약들이 마구 섞여서 있습니다. 가끔 아플 때 이것저것 드신다고 합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약들도 있습니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식료품들 사이로 커다란 믹스커피 상자도 보입니다. 위생문제, 약물 관리 문제, 식생활 관리 문제 등 진료실에서는 알수 없었던 건강문제들이 집안 켜켜이 쌓여있습니다.

어색한 첫 방문 진료 후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장애인 건강 주치의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환자의 건강을 위해 주치의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죠.

정신을 차리고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일단은 용법에 맞게 필요한 약을 잘 드시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약을 먹기 쉽도록 만들고 의사인 저에게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우선 방문 간호로 유통기한 지난 약물들을 다 수거하고, 약봉지에 크게 약을 어떻게 드셔야 하는지 써서 약물 상자에 정리를 해드렸습니다. 반복적으로 제가 환자의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려드리고, 병원에 나오실 때마다 손을 잡고 약을 잘 드셔야 하고, 믹스 커피도 줄이시도록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약을 제대로 먹기 시작하셨고, 혈압, 혈당이 조절되었습니다. 혈압, 혈당이 좋아질 때마다 크게 호들갑을 피우며 칭찬을 해드리렸더니 저와의 관계도 더 좋아졌지요. 요즘엔 저만 보면 좋다고 웃으시고 별일 없어도 저를 보러 병원에 들르실 정도가 되었습니다. 안과 정기검진은 하셨는데 아직까지 내시경은 못 하시겠다고 하니 넘어야 할 산이 남아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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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방문 진료를 통해 환자가 일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식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약을 관리하고 먹는 데 문제는 없는지, 위생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이외 집 안팎에 건강 위험 요소는 없는지 등을 살펴야 하고, 이런 정보들이 환자의 건강을 관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진료실을 나서는 걸음은 어색하고 힘들었지만,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방문 일정을 잡고 환자들의 집을 찾아갑니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저와 주치의 관계로 맺어진 장애인이 30여 명 정도가 되었고, 외래 진료 외에 따로 시간을 내어 하루에 두세 번 정도 왕진과 방문 진료를 나갑니다. 대부분 병원 근처에 사시는 분들이라 걸어서 찾아가고, 조금 먼 곳은 간호사나 작업치료사와 같이 차를 타고 나갑니다. 방문 가는 길에 아는 얼굴들을 만나 인사를 드리면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디 가세요?'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면 저는 웃으며 '몸이 불편한 분이 계셔서 방문 나갑니다'라고 답하지요. 며칠 전 한 어르신은 '나도 나중에 불편해지면 올 거요?'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망설임없이 대답해 드렸습니다. '당연하지요!'

이 글을 시작으로 저는 지역사회를 발로 뛰며 만난 많은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분들이 아플 수밖에 없었던 환경과 제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여러 가지 작지만 소중한 시도들과 실천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때로는 보람 있고 즐겁고, 때로는 화가 나고 슬프기도 한 경험들도 풀어보려고 합니다. 저도 아직 풋내기 왕진 의사이지만 작은 경험이라도 공유하려 하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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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 민들레지역사회의료센터장(가정의학과 전문의)이 지난 6월부터 프레시안에 “발로 뛰는 동네 의사, 야옹 선생의 지역사회 의료일지”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의료진과 환자가 함께 호흡하는 방문진료와 왕진, 가정간호의 현장이 생생하고 정감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프레시안(https://www.pressian.com)에 가시면 박 센터장의 더 많은 글을 볼 수 있어요. ‘좋아요’와 기사 공유, 댓글 달아주시면 힘이 쑥쑥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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