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역시의회] 대전명소 :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와 서대전 단재공원 >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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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 하면 우암 송시열 선생과 동춘당 송준길 선생을 떠올린다. 그 외에도 많은 인물이 있지만, 민족주의 사학자이며 언론인이며 문학가이며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도 대전이 낳은 인물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현주소로는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이다. 이곳에서 8살 때까지 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가 계시는 충북 청원으로 이사하였다. 본관은 고령이며, 호는 정몽주의 단심가에서 취하여 일편단생(一片丹生)의 단생을 썼으나 뒤에 단재(丹齋)로 고쳤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에 대하여는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르는 방법으로 꼿꼿이 서서 세수를 했다’라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떠한 굴욕과 압박에도 절대 굽히지 않은 인물이었다.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고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신이 1923년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작성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에서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이순신전, 을지문덕전과 같은 민족영웅전과 역사 논문들을 발표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끊임없이 노력했다.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대만으로 가던 중 5월 8일 일경에 피체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6년 옥사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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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선생의 생가가 우리 고장 어남동에 조성되어 있다. 처음 선생의 생가터는 1988년 옛터를 생각하고 돌아보는 (옛생돌) 모임에서 발굴하여 1991년 대전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으며, 1992년 고증을 토대로 생가지가 복원되었다. 생가 입구의 단재헌에는 홍보관이 조성되어 있다. 생가지에는 단재정사가 있는데 이곳에는 선생이 중국 망명 시절 백두산을 유람하고 쓴 시가 있다.

나라 잃은 서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다. 생가 옆으로는 선생의 동상도 조성되어 있다. 근대역사적인 큰 인물이 우리 고장 대전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이 큰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어남동 하면 모르는 대전시민들도 많다. 그만큼 외진 곳이다 보니 찾아가기가 힘들다. 그렇다 보니 선생의 정신을 시민들과 공유하기가 어려운 점이 많다. 그래서 유동인구가 많은 대전의 중심부 서대전 공원에 따로 동상을 설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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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을 제작한 김복규 작가는 “올곧게 독립운동만을 위해 살아온 모습과 한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선생의 모습을 입상으로 제작하였으며, 얼굴 모습은 표준영정과 교과서 사진을 기준으로 제작하고 의복은 일제강점기 3.1운동 때 입었던 두루마기를 고증하여 제작하였으며 동상 좌대에 새긴 어록은 선생께서 언론에 게재한 여러 논설 중 역사로 민족을 일깨우고자 하셨던 의지가 담긴 글귀를 선정하였다”라고 하였다.

어남동 선생의 생가지와 동상이 있는 서대전 공원은 조국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살다 가신 선생의 위대한 일생과 고귀한 정신을 우리 고장 대전의 정신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며 대전시민이라면 꼭 가봐야 하는 문화유적지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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